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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역사와 현실]‘다정한 아버지’ 이순신
등록일 : 2017-05-25
조회수 : 74
[역사와 현실]‘다정한 아버지’ 이순신

1592년 5월23일(음력 4월13일),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20만 대군을 보내 조선을 침략했다. 전쟁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도요토미는 자신의 어머니에게 편지를 보냈다. “어머님, 우리 일본군은 곧 조선을 완전히 정복할 것입니다. 이번 추석이 되기 전에 명나라의 수도까지도 손에 넣을 수 있을 것으로 봅니다.” 그러나 의기양양했던 도요토미의 얼굴은 찌푸려졌다.  

조선에는 그의 야욕을 좌절시킨 한 장수가 있었다. 이순신이었다. 일본군은 속전속결을 원했고, 그러려면 수륙양면작전이 필수적이었다. 이순신은 일본 측의 전략을 정확히 읽었다. 이순신이 거느린 조선 수군은 전술과 전력 면에서 일본을 압도했다. 일본의 침략전쟁은 장기화되었고, 도요토미는 애초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 숨을 거두었다.  

침략전쟁이 끝나고 일본의 지도층은 유성룡의 <징비록>을 구해 읽었다. 그들은 침략전쟁에 가장 큰 걸림돌이 이순신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들은 이순신의 실체를 궁금하게 여겼고, 그래서 더욱 많은 정보를 모으기 시작하였다. 알고 보니, 명장 이순신은 인격적으로도 흠결이 전혀 발견되지 않는 훌륭한 인간이었다. 일본인들은 이순신을 영웅으로 숭배하기 시작했다.

역사가로서 나는, 벌써 여러 해째 이순신에 관한 연구를 하고 있다. 당연히 처음에는 전쟁영웅으로서 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다음에는 그때 전쟁에 개입한 일본과 중국에서 이순신을 어떻게 보았는가, 하는 점이 관심을 끌었다. 지금은 인간 이순신의 모습을 바라보느라 여념이 없다.

이순신에게는 눈물이 많았다. 전쟁터에서 그의 모습은 강철 같았으나, 가족을 그리워하며 애태우는 이순신의 모습은 달랐다. 그는 꿈속에서도 돌아가신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홀로 눈물짓는 착한 아들이었다. 고향집에 두고 온 병든 아내 생각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엎치락뒤치락하는 남편이기도 했다. 아들과 딸에 관한 일이라면 자그만 잔병치레에도 안절부절못하는 인정 많은 아버지가 이순신이었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이순신의 집안에는 큰 재앙이 닥쳤다. 그의 셋째 아들 면이 아산의 본가에서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하였다. 그때 아들의 나이 스물한 살이었다. 슬픈 소식이 도착하기 전, 이순신은 꿈에서 비극의 전조를 보았다.  

“밤 두 시쯤 꿈속에서 나는 말을 타고 언덕 위로 올라가는데, 말이 발을 헛디뎌 냇물 속으로 떨어졌다. 쓰러지지는 않았으나, 막내아들 면이 끌어안은 것 같았다. 이게 무슨 징조인지 모르겠다. (중략) 저녁 때 천안에서 온 사람이 집안 편지를 가져왔다. 봉투를 뜯기도 전에 뼈와 살이 떨리고 정신이 아찔하며 어지러웠다. 대강 겉봉을 뜯고 열(예와 동일인)의 편지를 꺼냈다. 겉면에 ‘통곡’ 두 글자가 있었다. 면이 전사했음을 직감했다.”(<난중일기>, 1597년 10월14일)  

아버지는 아들을 여읜 슬픔을 걷잡을 수 없었다. “새벽꿈에 고향의 남자종 진이가 왔다. 나는 죽은 아들을 생각하여 통곡하였다. (중략) 저녁 때 코피를 한 되가량 쏟았다. 밤에 앉아서 생각하다 눈물이 절로 났다. 이 아픔을 어찌 말로 다하랴! (중략) 비통한 가슴 찢어질 듯하여 참지 못하겠다.”(1597년 10월19일) 슬픔은 그의 꿈속까지 자주 따라다녔다. “꿈속에서 면이 죽는 광경을 보고 구슬프게 울었다.”(1597년 11월7일)  

[역사와 현실]‘다정한 아버지’ 이순신

이순신의 마음을 헤아리다 보면, ‘세월호’ 참사를 당한 부모님들의 얼굴이 겹쳐 보인다. “어느새 간담이 떨어져 목 놓아 통곡하고 또 통곡했다. 하늘이 어찌 이다지도 인자하지 못하신가. (중략)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이치에 맞는 일이거늘. 네가 죽고 내가 살다니. 이런 어그러진 일이 어디 있느냐. 천지가 깜깜하고 태양조차 빛이 변했구나.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중략) 너를 따라가 지하에서라도 같이 지내며 같이 울고 싶구나. 그리하면 네 형들과 네 누이, 네 어머니가 의지할 곳이 없을 테지. 아직 참고 살기야 한다마는 마음으로는 이미 죽고 껍데기만 이렇게 남아 울부짖는다. 이렇게 울부짖는다. 오늘 하룻밤을 보내기가 일 년 같구나.”(1597년 10월14일)

슬픔에 젖어 애태우던 이순신은 아들이 숨을 거둔 지 일 년여 만에 노량해전에서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부모는 누구나 제 나름으로 자식을 사랑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순신처럼 정이 깊은 이는 그리 흔치 않을 것이다.  

나 같은 사람은 자신의 부족함을 돌아보지 않은 채, 자식을 가르치려고 들다 낭패하는 때가 있다. 아마 이순신에게는 그런 일이 결코 없었을 것이다. “절조를 지키며 몸가짐을 꼿꼿하게 견지한 것을 보면, 마치 석벽(石壁)이 높다랗게 우뚝 서 있는 것 같았다”(이식, ‘통제사증좌의정이공시장’, <택당선생별집> 제10권)는 후세의 평도 있다. 이순신은 자신에게는 한없이 엄격했으나, 집안에서는 정이 넘치는 훈훈한 아버지였다. 우리가 잘 몰랐던 이순신의 얼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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