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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은 현실적인 기술공학자”
인문강좌 ‘조선시대 과학문화와 다산 정약용’
등록일 : 2017-09-14
조회수 : 9,670

지난 9 13 ( ) 담헌실학관 103 호에서 열린 코리아텍 인문강좌에서 정성희 실학박물관 책임학예사는 " 조선시대 과학기술과 다산 정약용 " 라는 주제로 강좌를 진행했다 .

  정 학예사는 먼저 다산 정약용에 대해 , 다음으로 정약용이 조선시대 과학기술에 미친 영향을 설명했다 .

  정약용이 태어난 1762 년은 ' 임오화변 ( 壬午禍變 )' 이 있던 해이다 . ' 임오화변 ' 이란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가 노론과 부왕 영조에 의해 뒤주에 갇혀 며칠 뒤 사망한 사건이다 .

  정 학예사는 정조와 정약용은 왕과 신하 그 이상의 관계였다고 한다 . 다산 정약용은 정조의 권유에 의해 벼슬길에 올라 , 정조 집권 시대에 ' 기술공학자 ' 로서 조선에 많은 이바지를 했다 . 하지만 정조의 죽음은 정약용에게 청천벽력이었다 . 정조의 죽음 이후 , 정약용은 노론에게 정치적인 공격을 받았고 , 또 유배지에서 많은 저서를 저술하기도 했다 .

  다음으로 정약용의 호의 유래를 소개했다 . 일반인들이 흔히 알고있는 다산 이라는 호는 강진에 있는 다산 초당에서 정약용이 50 여권의 책을 저술했기 때문이다 . 정약용의 죽음 후 정약용 선생의 호가 ' 다산 ' 이라고 불리는 이유이다 . 또한 50 여권의 저술서를 ' 다산학 ' 이라고 부른다 .

  하지만 정약용 본인은 자신이 태어난 한강의 별칭인 ' 열수 ' 라는 호를 쓰기도 했다 . 정약용의 저술서에서 본인을 ' 열수 ' 라고 지칭하는 것을 볼 수 있다 .

  이어 다산 정약용의 과학기술 활동 . 정약용은 ' 배다리 ' 라고 하는 일명 ' 주교 ' 를 설치하였다 . 주교는 왕이 건너는 다리이다 . 정조는 주교를 통해 한강을 건너 사도세자의 릉에 들렀다고 했다 .

사도세자의 릉이 양주에서 화성으로 옮겨진 후 , 주교를 통하지 않는다면 돌아갔어야 할 거리를 곧바로 건널 수 있게 되었다 .

왕의 행차에는 많은 비용이 드는데 , 주교를 통해 비용과 시간을 절감할 수 있었다 .

이런 점에서 정약용은 ' 현실적인 기술공학자 ' 라고 볼 수 있었다고 정 학예사는 강조했다 .

  정약용이 ' 현실적인 기술공학자 ' 인 이유는 그 뿐만이 아니다 . ' 거중기 ' 를 만들어 화성을 짓는 데에 아주 큰 기여를 했기 때문이다 . 거중기는 무거운 돌을 들어올려 성벽을 쌓는데 도움을 주는 역할을 했는데 , 인적자원을 줄였다는 점에서 비용을 효과적으로 사용했다고 볼 수 있다 .

  또한 정약용은 ' 목민심서 ' 를 저술하여 실학에 대한 뜻을 펼쳤고 , ' 선기옥형 ' 에 대해 색다른 해석을 하는 등 , 백성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실제적인 정치 철학을 내세우는 등 ' 실천공학자 ' 에 대한 면모 또한 보였다고 말했다 .

   정 학예사는 마지막으로 공학의 성향 ( 실제적인 성향 ) 을 가진 다산 정약용과 물리학의 성향 ( 이론적인 성향 ) 을 가진 담헌 홍대용을 비교하였다 .

이 두 학자들의 교육 이념을 반영하는 코리아텍에 대하여 ' 완벽한 교육이념을 가졌다 ' 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강연을 마쳤다 .

 

 

취재 : 나래 이예진

촬영 : 나래 전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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