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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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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감문]중국하얼빈 연수를 다녀와서
박검진 기술이전지원팀장
등록일 : 2014-02-26
조회수 : 8,047

2014년2월11일~15일까지 4박5일간 대학 특별공로상 수상자들과 함께 중국하얼빈 연수를 다녀왔다.

2월11일 아침 비행기를 타고 2시간 정도 후에 하얼빈 공항에 도착했다. 오후지만 영화 10도가 넘는 대륙의 무서운 추위가 우리 일행을 반기고 있었다. 

우리는 하얼빈 중앙대로를 걸었다. 많은 사람들이 북적이고 있었고, 그 추운 날씨에 우린 100년 역사의 아이스크림을 사서 먹었다. 장갑이 없는 관계로 손은 동상이 걸릴 지경이었다. 도로를 걷다보니 안중근의사가 조선통감 이토오히로부미를 저격하기 전날 이발을 하신 곳을 지나치게 되었다.  

안중근의사가 거사를 위하여 11일간 하얼빈에 머물면서 동양평화의 원흉을 저격할 야심찬 계획을 이 기간 동안 세웠으리라.

우리는 하얼빈 근린공원을 방문하여 작은 빙등축제를 구경했다. 얼음으로 조각을 했고 얼음 안에는 등이 있어서 밤에는 더욱 멋진 광경을 연출했다. 이 아름다운 광경에 도취하기 전에 발목을 잡는 무언가가 있었다. 안중근의사의 기념비였다. 안중근 의사는 돌아가시기 전에 유언을 남기셨는데 “내가 죽으면 내 육체를 하얼빈에 묻었다가 조국독립이 되면 그날 내 뼈를 조국에 이장시켜주면 죽어서도 춤추며 독립만세를 부를 것이다” 안중근의사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중국 사람들 마음속에서도 영웅이었다.  

저녁이 되자 배가 출출하여 중국식당에 들어갔다. 중국에서는 외지에서 손님이 오면 건강을 오랫동안 유지하라는 뜻으로 국수를 먹는다고해서 국수집으로 들어갔다. 인상적인 것은 자장면이 있는데 우리 것과는 달랐다. 우리 것은 자장으로 비벼서 먹는 것이라면 중국식은 고기 등을 양념해서 비벼먹었다. 차라리 우리의 비빔 면과 비슷했다. 맛은 좋았다. 우리는 그밖에 족발을 삶은 것도 먹었다. 맛있는 음식을 비우고 하루의 피로를 풀고, 여장을 풀 호텔로 향했다.


2월12일 아침 우리는 서둘러 호텔을 나서, 하얼빈공업대학으로 향했다. 하얼빈 공업대학은 1920년에 세워진 국립종합대학이다. 당시에 철로건설 기술자를 교육하기 위하여 설립되었고, 1928년에 공식적으로 하얼빈공업대학으로 교명이 바뀌면서 중국과 소련이 공동 운영하였다. 초대총장은 러시아인이었다. 하얼빈은 소련과 가까운 곳에 있으면서 러시아의 문화적 영향을 많이 받았다. 도시의 건물을 보면 러시아 풍의 건물이 눈에 띈다. 방문 예정인 성 소피아성당도 러시아 풍이다.

1930년대 중국은 장제스의 국민당과 마오쩌둥의 공산당사이에서 내전이 지속되었다. 장제스는 항일전쟁은 공산당을 몰아내고 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우선 공산당 탄압을 강화했다. 1934년 공산당은 1만2000킬로 이상 쫒기면서 8만6000명의 당원 중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불과 8000명에 불과하였다. 장제스가 거의 승기를 잡을 즈음에 상하이와 베이징을 중심으로 내전을 종식하고 항일전쟁에 매진해야 한다는 마오쩌둥의 제안을 시민들은 환영했고, 결국 국공합작은 다시 시작된다.

중국이 한창 내전 중일 때, 일본은 1930년에 들어서면서 군부를 중심으로 군국주의를 진행하고 있었고, 1929년 미국에서 시작된 세계적인 대공황에 맞설 것은 침략전쟁 밖에 없다고 믿고, 국가전체를 거대한 병영으로 만들어 어린아이들까지도 통제하였다. 그들이 내세운 명분은 백인들의 침략에 맞서서 아시아인의 세상을 건설하자는 것이었다.

1931년 일본군은 만주를 침략하여 이듬해에 만주국이라는 꼭두각시 정부를 세운다. 그리고 1937년 중국을 본격적으로 침략하면서 민간인에 대한 학살과 만행을 저지르게 된다. 특히, 난징에서는 불과 두 달 사이에 최소한 30만 명 이상의 민간인을 대학살하게 된다.

이런 와중에 하얼빈공업대학은 1935년부터 일본인 총장이 일본어로 일본방식으로 대학을 운영한다. 이러한 일본식 교육체계는 1945년 일본의 패망과 함께 끝나고, 다시 중국과 소련 정부의 공동 관리체계로 운영되다가 1950년 중국정부가 관리하면서 중국인 총장이 취임하게 된다.

현재 하얼빈공업대학은 과학, 공학, 건축학, 인문학, 사회과학, 경영학 계열의 21개 단과대학으로 구성 중이고, 중국 최고 명문대학들이 결성한 C9에 속해있는 명문대학으로 거듭나고 있다.

이러한 명문대학을 방문하는 것은 큰 설렘이기도 했다. 우리가 대학에 도착하자 한국인 유학생이 우리를 반겨주었다. 방학 중이라 대학은 한가했다. 우리는 그 유학생의 안내로 도서관등을 방문하고, 박물관을 견학했다. 박물관에 도착하자 학교의 역사를 전문적으로 소개하는 안내원이 학교의 역사를 상세히 소개해 주었다.

[하얼빈공업대학정문-단체사진]



박물관에 들어가자 먼저 눈에 띈 것이 총장의 사진이 러시아인, 일본인, 중국인 순으로 배열되어 있었다. 얼마나 역사의 아픔을 가지고 이어진 대학인지 알 수 있었다. 그런 아픔을 딛고, 90년 이상 지속되고 있다는 점이 놀라울 뿐이었다. 하얼빈공업대학은 명문이기에 앞서서 중국내에서도 중국 표준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외국인 유학생이 많다는 설명을 들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1906년부터 사용된 나무를 비롯하여 수많은 대학의 역사를 기록하고 보관하고 있다는 점이 놀라웠다. 심지어 그 당시 학생과 교수의 노트도 보관되고 있었다. 이런 세부적인 것 까지도 보관하는 그들의 역사의식에 놀라울 수밖에 없었다. 우리 일행은 한목소리로 우리 대학도 하얼빈공업대학처럼 학교의 역사를 관리하는 부서를 만들어서 지금부터라도 학교의 역사를 관리하자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오후에는 호랑이와 사자가 있는 동물원을 구경했고, 이어서 제26회 하얼빈 SUNISLAND 국제 눈 조각 예술 박람회를 참관했다.


저녁에는 일본 삿포로 눈 축제, 캐나다 퀘벡 윈터 카니발, 대한민국 화천 산천어 축제에 이어서 세계 4대 겨울축제에 속하는 중국 하얼빈 빙등제를 참관했다. 기온이 영하 30도가 될 정도로 매서운 추위와 싸우면서 세계적인 얼음축제에 참여했다. 얼음으로 거대한 건물을 짓고, 그 속에 등을 만들어서 밤에 보면 동화 속에 들어온 기분이 들 정도로 아름다웠다. 마치 거대한 보석도시 같은 느낌이 들었다.


2월13일 아침 우리일행은 서둘러서 하얼빈 역 근처의 안중근의사기념관으로 향했다. 어쩌면 이번 연수에서 가장 의미가 있을 것 같은 곳을 방문한다는 것에 다소 긴장도 되었다. 중국의 시진 핑 주석이 박근혜대통령의 청을 받아드려서 안중근의사기념전을 기념관으로 바꾼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라 꼭 가보고 싶은 곳이라 발걸음을 재촉했다.

기념관에 도착해서 들어가 보니 크지 않은 규모에 창 너머로 안중근의사가 당시에 이토오히로부미를 저격했던 역사의 현장이 유리창 너머로 보였다. 우리는 숨을 죽이고 역사의 현장을 목격했다. 그날 마침 중국인 관장이 대한민국 주중대사가 오후에 방문하기에 나와 있었다. 우리는 관장과 인사를 하고 약소하지만 기부금을 전달하였다.


[이토히로부미를 저격한 역사적인 현장]

 

[안중근의사 기념관 관장과 단체사진]




안중근의사는 1909년 10월26일 역사적인 거사를 이룩하고, 체포되어 하얼빈 인근의 당시 일본영사관 감옥에서 4일을 체류한 후, 여순 교도소로 이송된다. 여순 교도소로 이송간 안중근의사는 교도소 안에서도 많은 글을 남긴다. 법정에서 안중근의사는 일본인들이 동양 평화를 해친 죄 등 모두 15개 항목을 들어서 저격한 이유를 설명하고, 안중근 본인이 저격한 것이 아니라 안중근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거사를 했음을 밝힌다. 당시 공판을 지켜본 일본인들조차 감동을 받자 재판장은 서둘러 휴정을 선언하기에 이른다. 이 광경을 지켜본 영국인 기자는 오늘 세계적 재판의 진정한 영웅은 안중근이라고 대서특필한다.

당시에 안중근의사의 거사가 얼마나 세계적인 관심거리였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며, 안중근의사의 거사가 얼마나 역사적 의의를 가지는지 알 수 있다.
안중근의사는 1910년 2월14일 사형언도를 받으면서 일본인 재판장에게 물었다고 한다. “일본에는 사형보다 더한 죄는 없소?” 안 의사는 항소를 할 수 있다는 일본인 재판관의 말을 무시하고, 항소를 포기한다. 그의 어머니는 구질하게 생명을 연장하느니 대한남아답게 의롭게 죽는 것이 효도라고 말한다. 

1910년 3월26일 안중근의사는 여순 교도소에서 사늘한 시신이 되었다. 그가 죽은 후, 그의 시신을 찾기 위하여 그의 동생들이 찾아가나 일본인들은 안 의사를 암매장시킨다. 그 후, 한중 공동으로 안 의사의 시신을 찾기 위한 노력을 했으나 아직도 찾지 못하고 있다.

중국의 하늘 아래 어딘가에서 묻혀 있을 안 의사를 생각하면서 기념관 방명록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기고 왔다. “애국지사 안중근의사의 넋을 이곳 하얼빈에 두고 고국으로 향하는 마음이 울적하여 이곳 하얼빈 역 기념관에 몇 줄 남기고 갑니다.” 

안중근의사가 가신지 100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우리 마음속에 살아 숨 쉬고 있는 것은 대한남아의 기개를 세계에 알린 거사요, 우리가 일본의 속국은 되었지만 마음까지 속국이 아니라는 것을 알린 거사이기 때문이다. 매년 3월26일을 임이 가신 날로 기념일로 선정하여 우리뿐만 아니라 중국인들도 애도를 표하는 날로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2월14일 아침 우리 일행은 일본인들이 화학전을 위하여 생체 실험의 만행을 저질은 731부대를 방문하기 위하여 호텔을 나섰다. 차로 40분 정도 가니 그 역사의 현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731부대 정문에 도착하기 직전에 철로가 보였는데 그 당시 일본군이 건설했고, 그 철로를 이용하여 실험결과와 장비를 이동했다고 한다. 그 얘기를 들으니 내부에 들어서기도 전에 섬뜩함을 느꼈다. 정문에 도착해서 내부로 들어가니 중국 현지인들이 당시 일본군 만행을 각 전시관마다 상황설명을 하는데 우리말로도 통역이 되고 있었다. 우리는 통역기를 귀에 꽂고 전시실을 방문했다. 전시된 물품을 볼 때마다 일본군들의 만행에 치가 떨렸다. 무려 31가지 생체 실험을 했다고 한다.


[731부대 정문]




예를 들어보면, 매독실험(여자 포로를 대상으로 매독 균을 투입하고 관찰), 대체수혈실험(말과 원숭이의 피와 인간의 피를 교환에서 얼마나 사는지 실험), 동상실험(영하40도의 추운 날씨에 옷을 벗겨 밖에 장시간 묶어두고 동상에 걸리게 한 후 실험), 보병 총 성능실험(수명의 사람을 일렬종대로 세워놓고 맨 앞사람 가슴에 방아쇠를 당겨 관통력을 실험), 신무기 성능실험(밀폐된 방안에 사람을 묶어 놓고 수류탄을 터트려 얼마나 죽는지 실험), 독가스실험(밀폐된 방안에 사람을 넣고, 죽어가는 과정 실험), 인공낙태실험(임산부 자궁에 구더기를 넣고 구더기가 얼마나 태아를 갉아 먹는지 실험), 화상실험(화약을 얼굴에 심고, 불을 붙여 얼마나 타 들어가는지 알아보는 실험), 교잡실험(강제로 아시아인과 러시아인을 교배시킨 실험), 민간인지역 페스트 실험(벼룩 1만 마리를 풀어서 실험), 착혈실험(대형 원심분리기에 산사람을 매달아 고속으로 회전시켜 눈, 귀, 코, 입, 항문 등으로 피가 나오는 과정을 실험), 심지어 살아있는 사람을 마취 없이 장기를 꺼낸 실험도 했다고 한다.

731부대는 1932년~1945년까지 하얼빈에 있던 일본군 부대로, 살아있는 사람을 대상으로 화학, 세균전을 위한 연구를 위하여 생체실험을 자행한 극악무도한 부대를 말한다. 일왕직속부대로 약 1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실험재료인 마루타가 되어서 산채로 죽어갔다. 당시 731부대 사령관이었던 이시이시로는 교토 대를 나온 의사로 생체실험을 감행하여 세균무기와 독가스탄을 만들어 총 1600차례에 걸쳐서 중국일대에 살포하여 중국군과 민간인을 포함하여 무려 57만 명을 희생시켰다.

당시에 이시이시로는 중국인, 조선인, 몽골인, 러시아인 등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실험했다고 한다. 그들은 마루타라는 이름으로 죽어갔는데 마루타는 껍질만 벗긴 통나무라는 일본어 뜻이라고 한다. 이런 잔악무도했던 이시이시로는 패전 전범재판에서 무죄를 선고받는다. 미국에게 실험 자료를 넘겨준다는 조건으로 도박을 했고, 미국은 의학발전이라는 명분으로 그를 살려준다. 물론 중국과 러시아는 반대했으나 다른 서방국가들의 도움으로 이시이시로를 살리는데 성공한다. 그 수많은 실험 자료를 미국은 어디에 활용했을까? 살인마 이시이시로가 살아남은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우린 무거운 마음으로 다음 행선지인 성 소피아성당으로 향했다. 본 성당은 그리스 정교회 성당으로 하얼빈 건축예술관이라고도 한다. 이 성당은 동아시아 지역 최대 규모의 성당이다. 1903년 중동철로를 개통하면서 제정 러시아의 보병사단이 하얼빈에 들어왔고, 러시아 정부에서는 병사를 위한 군 예배당으로 1907년 나무구조로 된 성당을 건축했고, 1923년부터 9년간 재건축을 시작하여 우아하고 화려한 성당으로 완성했다.


2월15일 여장을 챙기고 공항으로 가기 전에 공자의 문묘를 방문하고, 헤이룽장 성 박물관을 방문하여 흑룡강 성의 역사문물을 참관하고 마지막으로 중국군가를 작곡했다는 조선인 작곡가 정율성 기념관을 방문했다. 흑룡강 성은 길림성과 요녕성과 함께 동북3성에 속하는 성으로 헤이룽장 성이라고 한다. 면적이 남북을 합친 면적보다 2배 이상 크고, 인구가 4000만 명에 이르고, 한족, 만주족, 조선족, 몽골족 등 49개의 민족으로 이루어진 역사가 깊은 곳이다. 이곳에는 러시아와 북한의 국경을 마주보고 있어서 한국인들이 많이 찾는 곳이기도 하다.



[맺음말]

4박5일간 대학 직원선생들과 함께한 중국 하얼빈 연수는 깊은 감동과 결속을 다지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무엇보다도 민족의 영웅인 안중근의사의 기념관을 보았고, 일본군들의 만행의 현장인 731부대를 방문했고, 중국 명문 대학 중에 하나인 하얼빈 공업대학의 방문이 인상 깊다.

하얼빈 공업대학은 교훈이 “규격엄격 공부도가”인 만큼 우리대학의 모토인 실사구시와 유사한 바가 많은 대학이므로 학교 차원에서 MOU를 체결하여 우수학생들의 교류도 활발히 이루어지길 바란다.

정부에서도 이번 안중근의사 기념관으로의 격상으로 인해 앞으로 정부 인사들도 많이 방문할 것으로 예상되고, 한국인 관광객도 증가할 것으로 예상되므로 우리대학의 위상을 한 차원 높이는 차원에서 학교간의 교류에 적극적으로 대응했으면 한다. 이미 고려대와는 MOU를 체결했으니 고려대를 방문하여 노하우를 듣고 진행하면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함께 4박5일간 연수를 한 선생님들 그리고 현지 가이드와 국내 가이드의 노고에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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